원인과 배경
3·1운동은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 지배에 대한 민족의 저항으로 일어났다. 일본은 조선을 강점한 뒤 군사력을 배경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각 분야에서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을 자행하는 무단통치(武斷統治)를 실시했다.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해 수많은 항일운동가들을 학살·투옥하고 모든 형태의 반일 활동을 탄압했다. 그리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기본적인 정치적 권리와 자유도 누리지 못하게 했으며, 조선태형령(朝鮮笞刑令)으로 가벼운 죄에도 가혹한 신체적 처벌을 가하여 인권을 유린했다. 또한 토지조사사업과 회사령 등으로 민족 산업의 발전을 억압하고 경제적 수탈을 자행하였다. 1910년대에 지속적으로 나타난 이러한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약탈로 농민을 비롯한 민중의 생활은 크게 악화되었으며,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분노와 저항의지가 높아졌다.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 민족운동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고,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는 주체적인 여건을 준비하였다. 1910년대 국내의 항일민족운동은 크게 세 가지 흐름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첫째는 독립전쟁론의 관점에 기초해 무장조직의 결성과 지원을 목적으로 했던 비밀결사운동이다. 대한독립의군부, 민단조합, 광복회, 조선국민회 등의 비밀결사가 각지에서 결성되어 군자금 모금과 무기구입 등을 추진했다. 많은 조직들이 일제에 발각되어 파괴되었지만, 이들의 활동은 3·1운동 당시 각지에서 나타난 비밀결사의 모체가 되었다. 둘째는 실력양성의 관점에 기초해 종교단체와 학교 등을 중심으로 전개된 교육·문화운동이다. 1910년대에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각지에 설립된 사립학교, 서당, 야학 등은 3·1운동 당시 각 지역에서 항일운동을 조직하는 거점이 되어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셋째는 일제의 경제수탈에 대한 농민·노동자의 생존권 수호운동이다. 농민들은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토지조사사업 반대투쟁, 삼림정책 반대투쟁, 각종 조세 반대투쟁 등을 벌였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주재소나 면사무소 등 일제의 통치기구를 공격하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노동자들도 민족적 차별대우와 장시간 노동, 저임금 등 열악한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 이러한 농민·노동자의 투쟁양상은 3·1운동에서도 항일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강화하여 나타났다.
이처럼 일제의 폭압적인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분노가 3·1운동이 폭발적으로 나타나게 된 기본 동인이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전후로 한 국제정세의 변화도 3·1운동이 일어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쟁탈전의 성격을 지닌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을 비롯한 동맹국의 패전으로 끝나면서 열강 간의 힘 관계가 재조정되어 국제 정치의 큰 변화가 나타났다.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오스만제국 등에서 전제국가가 무너지고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수많은 국가들이 독립하여 새로 탄생하면서 민족주의가 고조되었다. 특히 1917년 러시아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나 제정 러시아 치하의 피압박 민족들에게 민족 자결의 원칙을 선언하면서 식민지 민족운동들에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1918년 1월에는 미국의 윌슨 대통령도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하여 세계의 식민지 약소민족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에 즈음하여 나타난 이러한 새로운 시대 분위기는 국내외에서 항일민족운동의 기운을 고조시켰으며, 특히 민족주의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의한 베르사유 체제의 성립을 ‘세계 개조의 신시대’로 인식하면서 독립에 대한 민족의 열망을 환기시켜 열강의 도움으로 독립을 이루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