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과정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 정세가 재편되는 상황에서 국외의 항일운동세력은 국제 사회에 일제의 조선 강점의 불법성과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널리 알리기 위한 활동을 준비하였다.

상하이[上海]에서는 1918년 6~7월 무렵부터 여운형(呂運亨)·김규식(金奎植)·장덕수(張德秀)·김철(金澈)·선우혁(鮮于爀)·서병호(徐丙浩)·한진교(韓鎭敎)·조동호(趙東祜) 등이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은 그 해 11월 28일 윌슨 대통령의 특사로 중국에 온 크레인(Charles R. Clane)에게 독립청원서를 전달하였다. 그리고 1919년 1월에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평화조약을 협의하기 위해 개최된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했고, 여운형은 만주와 연해주로, 선우혁·김철·서병호, 김순애(金淳愛) 등은 국내로, 장덕수는 일본으로 건너가 각지의 인물들과 협의하여 대규모 독립운동의 추진을 준비하였다.

미국에서는 1918년 12월 안창호(安昌浩) 등이 조직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가 중앙총회를 열어 이승만(李承晩)·민찬호(閔瓚鎬)·정한경(鄭翰景) 등 3인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미국이 출국을 허가하지 않자 1919년 2월 25일 이승만은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을 일본의 학정에서 구할 것, 장래 조선의 완전 독립을 보증할 것, 조선은 당분간 국제연맹의 통치하에 둘 것 등의 3개조로 된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였다.

만주와 연해주에서는 1918년 12월 조소앙(趙素昻)이 ‘대한독립선언서’를 작성해 여준(呂準)·김좌진(金佐鎭)·황상규(黃尙奎)·박찬익(朴贊翊)·김교헌(金敎獻)·안창호·김규식 등 39명의 서명을 받아 이듬해 2월 1일 이를 발표하였다. 음력으로 무오년(戊午年)에 작성되어 ‘무오독립선언(戊午獨立宣言)’이라고도 불리는 ‘대한독립선언서’는 무장투쟁으로 완전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며 독립군의 궐기를 촉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1919년 1월 조선인 유학생 학우회가 도쿄[東京]의 YMCA회관에서 웅변대회로 꾸며 모임을 갖고 최팔용(崔八鏞)·김도연(金度演)·백관수(白寬洙)·서춘(徐椿) 등 10인을 상임위원으로 선출해 독립선언을 준비하였다. 이들은 각지의 독립운동가들과 연계를 맺기 위해 송계백(宋繼白)과 이광수(李光洙)를 국내와 상하이로 파견하였고, 2월 8일 유학생대회를 열어 민족대회소집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2·8독립선언서’는 일제의 국권강탈을 고발하고 독립운동으로 건립될 국가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신국가임을 명시하였다.

국내에서도 1918년 말부터 국내의 천도교와 기독교 계통의 민족주의자들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윌슨의 14개조 강화원칙에 포함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독립 요구를 위한 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다 상하이, 미국, 도쿄 등지에서의 독립운동 소식이 전해지면서 국내 운동의 준비를 본격적으로 논의하였다. 신한청년당의 선우혁은 이승훈(李昇薰)·양전백(梁甸伯)·길선주(吉善宙) 등 평안도 지역의 기독교 지도자들과 만나 국외 독립운동의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송계백도 최린(崔麟)을 통해 도쿄 유학생들의 소식을 손병희(孫秉熙)·최남선(崔南善)·송진우(宋鎭禹) 등에게 전했다. 천도교와 기독교, 학생들은 처음에는 각기 운동을 계획하다가 1919년 2월부터는 함께 협의하였고, 여기에 한용운(韓龍雲) 등의 불교계 인사가 가담했다. 학생들은 1919년 1월부터 민족대표들과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운동을 계획하였으나, 2월 하순 박희도(朴熙道)와 이갑성(李甲成)에게 종교계의 계획에 합류할 것을 요구받고 일단 민족대표들의 계획에 합류한 뒤 3월 5일에 다시 서울에서 독자적으로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했다. 그 결과 2월 18일까지 독립선언서와 일본 정부에 보낼 독립통고서 등이 작성되고, 2월 27일에는 독립선언서가 인쇄되어 각 종교의 교단 조직을 통해 사전에 배포되었다. 학생들은 군중 동원과 시위, 독립선언서의 배포 등의 계획을 준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