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제목독립운동의 암흑기 밝힌 靑年의 거사… 두 巨人에 희망을 안기다2019-05-03 21:2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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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1일, 임시정부 100년] [이승만·김구의 나라 만들기] 
[5] '윤봉길 의거' 1932년 4월 29일 전후

김구는 1932년 4월 28일 윤봉길과 점심을 함께했다. 스물네 살 청년 윤봉길이 훙커우(虹口)공원에서 거사하기 전날이었다. 상하이 망명 13년 차에 접어든 쉰여섯 살 김구는 그때 임시정부 재무장이었다. 만난 곳은 상하이 기독교청년회관(YMCA). 당시엔 불과 7개월 전 건축한 최신 9층 건물이었다. 지금은 4성급 호텔로 바뀌었다. 임정 청사가 있는 신톈디(新天地)에서 동북쪽 약 2㎞ 떨어진 다스제(大世界)역 인근에 있다.

김구는 이곳에서 윤봉길과 점심을 먹으며 "거사 장소를 미리 가보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거사 당일엔 오전 6시쯤 만나 김해산(임시의정원 의원)의 집에서 마지막 식사를 함께했다. 원창리(元昌里) 13호로 알려져 있다. 임정 청사에서 서북쪽으로 걸어서 15분쯤 걸린다. 좁은 골목을 두고 양쪽에 13~46호가 잇달아 있다.

김구와 윤봉길이 식사를 마칠 때쯤 오전 7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윤봉길은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김구에게 시계를 바꾸자고 했다. "제 시계는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입니다. 저는 한 시간밖에는 더 소용이 없습니다." 김구는 택시를 타고 떠나는 윤봉길에게 말했다. "뒷날 지하에서 만납시다."
 

윤봉길은 거사 전 한인애국단 선서문을 목에 걸고 태극기 앞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아래 사진은 루신공원(옛 훙커우공원) 안에 있는 윤봉길 기념관 ‘매헌’. /국사편찬위원회·이한수 기자

윤봉길 의거는 침체했던 독립운동에 다시 불을 지핀 최대 의열투쟁으로 평가된다. 김구는 석 달여 전 이봉창의 도쿄 의거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았다. 이봉창은 1월 8일 도쿄 사쿠라다몬에서 일왕을 노리고 수류탄을 던졌지만 마차 바퀴만 파손됐다. 윤봉길이 던진 물통형 폭탄은 성능이 좋았다. 상하이 파견 사령관 시라카와가 사망했고 9사단장 우에다, 3함대 사령관 노무라, 주중 일본공사 시게미쓰가 중상을 입었다. 현재 루신공원으로 바뀐 의거 현장에는 윤봉길 기념관 매헌(梅軒)이 있다. 황푸 강가에서 택시로 20분쯤 걸린다.

이봉창·윤봉길 의거가 일어나던 때 이승만은 뉴욕에 있었다. 일제가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하와이에서 다시 미 본토로 건너갔다. 이승만은 1932년 1월 9일 현지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일제의 만주 침략을 규탄했다. 미 당국은 해외 망명 28년째인 쉰일곱 살 이승만에게 일본인들이 위해를 가할 것을 우려했다. 경찰을 파견해 이승만을 경호했다. 이승만은 이날 일기에 "경찰청장이 나를 호위할 형사 두 사람을 보냈다"고 적었다.


윤봉길 의거 직후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은 경찰·헌병 66명을 동원해 프랑스인 형사 12명과 함께 프랑스 조계 내에서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했다. 김구를 비롯한 임정 인사는 피신했지만, 안창호는 프랑스 경찰에 체포돼 일제 경찰에 넘겨졌다. 한인 11명도 붙잡혔다. 이승만은 구미위원부 명의로 워싱턴 주재 프랑스 대사에게 편지를 보내 항의하고 한국인의 즉각 석방을 촉구했다. "프랑스 정부는 일본에 대해 체포된 한국인을 석방하여 프랑스 조계로 돌려보내도록 요구해야 합니다. 그들을 일본의 무법한 희생에 방치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김구가 윤봉길과 거사 전날 점심을 함께한 상하이 YMCA(왼쪽). 호놀룰루에는 ‘쿨라 콜레아(KULA KOLEA)’라는 길이 있다. 이승만이 세운 한인학교가 도로 이름으로 남았다.이미지 크게보기
김구가 윤봉길과 거사 전날 점심을 함께한 상하이 YMCA(왼쪽). 호놀룰루에는 ‘쿨라 콜레아(KULA KOLEA)’라는 길이 있다. 이승만이 세운 한인학교가 도로 이름으로 남았다. /이한수 기자

이승만은 당시 임시정부에 직위를 갖지 않은 상태였다. 1925년 3월 18일 임시의정원에서 탄핵안이 통과됐다. 임정 청사에 부임하지 않았다는 게 주요 이유였다. 1920년 12월부터 약 6개월간 상하이에 머물렀던 이승만은 이후 하와이를 근거지로 삼아 교육·언론 활동을 하고 필요할 때 미 본토로 건너가 구미위원부 활동을 펼쳤다. 교민 6461명(1931년 통계)이 사는 하와이는 한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해외 지역이었다. 이승만은 1923년 9월 호놀룰루에 한인기독학원 새 교사(校舍) 부지를 마련하고 해방 이후까지 학교를 운영했다. 이전한 한인기독학원은 현재 칼리히 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태평양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이다. 하와이 말로 한국 학교를 뜻하는 '쿨라 콜레아(kula kolea)'라는 도로 이름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이승만은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높이 평가했다. 이승만은 해방 후 김구가 낸 '도왜실기(屠倭實記)' 서문에 썼다. "왜황 유인(裕仁·히로히토)을 향해 이(봉창) 의사가 던진 폭탄 한 개는… 한국 민족이 일본에 대해 금일까지 꾸준히 반항하고 있다는 증거를 세계에 표명하였으며,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사건은… 세계도 또한 한국 독립의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음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조선일보 A23면